창작이야기(사랑)

🌧️ “사랑이 뭔지, 너를 만나고 처음 배웠어” – 회피형 남자의 첫 사랑 이야기

히야121 2025. 6. 23. 18:14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완전히 믿어?”
“나는, 너는… 적어도 넌, 믿어도 될 것 같아.”


1. 첫 만남, 비 오는 어느 오후

“여기… 자리 있어요?”

그날도 비가 왔다. 유난히도 많이, 하염없이 내리던 날이었다. 사람들은 카페 안으로 피신하듯 몰려들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구석에 혼자 앉아있던 내 자리 앞에, 그녀가 물었다.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비가 유난히 우울하다고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럴 땐 혼자가 편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를 감출 수 있는 곳. 그런 오후였다.

“혼자 계시길래, 방해일까 했어요.”

그녀는 말끝에 웃음을 살짝 실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사람을 보면 가끔 궁금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말을 거는 걸까. 낯선 타인의 말투, 목소리, 그리고 온기 같은 걸 믿어도 되는 걸까.

“…괜찮아요.”

내가 내뱉은 말은 짧고, 냉담했다. 아마 그때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내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2. 그 남자의 어린 시절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두고 떠났다고 해야 맞겠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새벽같이 싸늘한 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짐을 싸서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잘해도, 착해도, 웃어도… 결국 떠날 사람은 떠난다.

사람을 믿는다는 게 나에게는 불가능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면, 반드시 댓가는 돌아왔다. 실망이든, 버림이든, 상처든.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해도 늘 거리를 뒀다. 연락은 느렸고, 감정 표현은 더뎠다. 애써 ‘쿨한 남자’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가까워지면 잃게 될까봐. 그래서 미리 거리를 두고, 감정을 덜 주는 걸 택했다. 회피형 애착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땐, 마치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도청한 기분이었다.


3. 다시, 그녀와의 대화

“혼자 있는 거 좋아하세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전 누가 옆에 있어줘야 마음이 편해져요. 혼자 있는 건 아직 좀 무서워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무섭다는 감정, 잊은 지 오래됐네요.”

“그런 말, 좀 슬퍼요.”

그녀는 내 말을 그대로 받아 적듯,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낯설었다. 누군가가 내 말에 슬퍼하는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무심하거나, 그냥 넘기거나, 혹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덮어버리곤 했는데.

그녀는 그날 이후로 자주 내게 말을 걸었다. 같은 카페, 같은 자리에서 우연처럼 몇 번 마주쳤다. 아마… 일부러 맞춘 걸지도.


4. 나도 모르게, 조금씩

“혹시 내일도 이 시간에 여기 계실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처음으로 ‘예정’을 정했다.

“있을 수도요.”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약속 비슷한 걸 한 순간이었다. 말은 애매했지만, 마음만은 꽤 분명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녀는 왔고, 나도 있었다.

“오늘은 왜 혼자 있고 싶었어요?”
“…습관이에요. 그냥 익숙한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익숙한 게 꼭 좋은 건 아니에요. 전, 사람 곁이 익숙해졌으면 좋겠어요. 그게 더 따뜻하니까.”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더라. 아마 엄마가 떠나기 전날 밤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5. 마음이 뚫리는 날

“나는요, 가까워지는 게 무서워요.”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맥락 없이. 그녀가 무언가를 기대하듯 나를 바라볼 때, 내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가까워지면 뭐가 무서운데요?”

“…잃게 되니까요. 사랑받다가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떠나지 않는다면요? 어떻게 되는데요?”

나는 그 손을 보며 숨을 삼켰다. 마음 한 구석에서 오래전 꽁꽁 얼어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머뭇거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는, 아마도. 사랑이 뭔지 알게 될지도 몰라요.”


6. 그리고, 사랑을 배워가는 시간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은 익숙하지 않았다. 손을 잡는 것도, “잘 잤어?”라는 문자도, “오늘은 뭐 하고 싶어?”라는 질문도. 모두가 낯설고 서툴렀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려줬다.

“괜찮아요. 당신은, 나랑 다르게 살아왔으니까. 그냥, 나랑 같이 익숙해지면 돼요.”

나는 그 말에 처음으로 울었다. 진짜 눈물이었고, 말없이 흘러내린 뜨거운 감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랑은 확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기다림과 수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7. 그녀와 함께한 계절들

봄에는 그녀와 벚꽃길을 걸었다. 여름에는 같이 더위를 피할 카페를 찾아 헤맸고,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보며 사진을 찍었다. 겨울에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에 마음을 데웠다.

처음에는 나를 감췄지만, 그녀 앞에선 조금씩, 아주 조금씩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첫 번째 연인이자, 첫 번째 ‘가족’이었다.

“사람은요, 상처받아도 다시 사랑할 수 있어요. 그걸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녀가 했던 말은, 내 삶을 바꿨다.


8. 마침표가 아닌, 쉼표처럼

나는 여전히 완벽하진 않다. 누군가에게 전부를 맡기기엔 겁이 많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다가가는 것.

버림받은 기억이 있어도, 그 기억을 덮는 건 또 다른 따뜻함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