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갈림길, 마음의 방향
며칠이 흘렀다. 지훈의 카메라에는 수연과 함께한 풍경이 점점 늘어났다. 산딸기를 따는 모습, 마을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 산책길에서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모습. 사진 속 그녀는 언제나 자연스러웠고, 그 순간을 담은 지훈의 시선은 더없이 따뜻했다.
그날도 둘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산길 아래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퍼졌다.
“지훈 씨는, 언제 서울로 돌아가요?”
수연이 불쑥 물었다. 그녀의 말은 마치 그 계곡물처럼 조용했지만, 지훈의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다.
“…사실은, 이번 주말에요.”
“아… 그렇구나.”
순간, 둘 사이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고, 지훈은 그런 수연의 표정을 살피듯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 더 있고 싶긴 해요. 솔직히.”
“그럼, 있으면 되잖아요.”
수연은 말하고 나서 스스로도 당황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 그게… 그냥, 말이 그래요. 무슨 책임질 것도 아니고.”
지훈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수연을 바라봤다.
“나, 수연 씨 좋아해요.”
그 말은 갑작스러웠지만 어딘가 오래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들렸다. 수연은 놀라서 지훈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갑자기 아니에요. 산딸기 바구니 받았을 때부터 그랬는지도 몰라요. 당신이 환하게 웃을 때, 난 그냥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감정과 함께 걱정도 차올랐다.
“…근데, 우린 너무 다르잖아요. 당신은 도시 사람이고, 나는… 그냥 여기서, 조용히 사는 사람이에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수연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도 거친 감촉이었다.
“그래서 더 끌리는 거 아닐까요?”
그날 이후, 둘은 더 조심스러워졌고, 동시에 더 가까워졌다.
며칠 뒤, 수연은 혼자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지훈이 며칠 전에 찍어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산딸기 바구니를 안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수연은 사진을 쓰다듬었다.
“도시로 가겠지… 결국엔.”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지훈이었다.
“수연 씨, 오늘 저녁 괜찮으면… 마지막 산책할래요?”
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응. 기다릴게요.”
저녁, 해가 넘어가고 분홍빛 노을이 하늘을 채우던 시간. 두 사람은 마을 어귀에서 다시 만났다. 어색한 듯, 그러나 꼭 만나야만 했던 두 사람.
“수연 씨.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말할게요.”
“응…”
지훈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내가 돌아가도… 계속 생각날 거예요. 분명히.”
“나도… 그럴 것 같아. 여기, 이 바람도, 산딸기도, 지훈 씨도.”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아주 조심스럽게 서로의 이마를 맞댔다.
“혹시… 서울에 오게 되면, 연락해도 돼요?”
“당연하지. 근데…”
“근데?”
“그때까지 나, 계속 기다릴 수 있을까?”
지훈은 수연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기다릴게요.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그리고 그날 밤, 둘은 계곡 옆 평상에 앉아 오래도록 별을 올려다보며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다정하게, 그러나 애틋하게.
(계속됩니다 – )
4장.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서울로 돌아간 지훈은 여느 때처럼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고객의 요구에 맞춰 사진을 보정하고, 기획안을 수정하는 일상. 그의 눈동자엔 활기가 없었다. 마치 평범한 도시의 회색빛 풍경처럼.
그의 책상 한켠, 프린트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수연이 산딸기 바구니를 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그날 저녁, 지훈은 친구와의 저녁 자리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야, 너 요즘 왜 그래? 뭐 씌인 거 아냐?”
친구 준혁이 툭 건넸다. 지훈은 맥주잔을 들어올리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그 마을에서 만난 여자 생각이 자꾸 나.”
“그 수연이라는 사람? 며칠 같이 있었다고? 여행 감성에 취한 거 아냐?”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그냥…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연락은 해봤어?”
“…아직.”
“야, 바보야. 그렇게 좋으면 연락이라도 해봐야지!”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두려웠다. 그녀는 마을에 그대로 있을까? 이미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진 않을까?
한편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수확철이 다가오며 마을은 다시 분주해졌고, 수연은 하루 종일 할머니를 도우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멈춰 있었다. 매일 저녁, 창문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지훈 씨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연락 한 통 없네… 나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느 날, 마을 우체통 앞에서 멈춰 선 수연은 작은 기대를 안고 사서함을 열었다. 그러나 지훈에게서 온 편지는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삼켰다.
“괜찮아. 기대한 건 아니니까…”
그러나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산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사진을 찍던 지훈의 모습을 떠올렸고, 산딸기를 따다가도 그가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이 산딸기, 수연 씨 닮았네요. 새콤하고, 진해요.”
“진해요? 뭐가요?”
“마음이요.”
그리고 마침내, 지훈은 전화를 걸었다. 화면에는 ‘수연’이라는 이름이 떴고,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여보세요…?”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지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연 씨.”
“…지훈 씨?”
수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왜, 이제야…”
지훈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미안해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근데, 매일 생각났어요. 그 사진들 보면서.”
“저도요. 매일 산길 오르면서 당신 생각했어요.”
한동안 전화기 너머로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시, 올 거예요?”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갈게요. 꼭 다시 갈게요.”
며칠 뒤, 수연은 산길 초입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과 같은 체크무늬 앞치마를 입고, 바구니엔 아직 덜 익은 산딸기 몇 알이 담겨 있었다.
“혹시, 이거… 지갑이세요?”
어느새, 익숙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지훈이 서 있었다. 가방 하나에 카메라만 들고, 땀에 젖은 웃음으로.
“또 떨어뜨렸네요, 제가.”
수연은 웃으며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요.”
그날 저녁, 마을의 노을은 유난히 붉었다. 산자락 너머로 해가 지고, 바람은 여름의 끝을 알리는 듯했다. 수연과 지훈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엔… 얼마나 머물러요?”
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갈 데 없어요. 여기 남을 거예요.”
“정말?”
“정말.”
수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동시에 미소도 피어났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요. 산딸기부터.”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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