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던 나, 감정에도 자리가 있다는 걸 알려준 당신
“미안해. 괜히 기분 상하게 했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나는 늘 그렇게 내 감정을 눌러 담았다. 마치, 내 기분은 늘 뒷전이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처럼.
그게 나를 지켜주는 방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나를 가장 먼저 버리는 습관이기도 했다.
1. "울면 안 되는 아이"로 자랐던 나
어릴 적 나는 많이도 울었다.
그땐 이유도 다양했다. 친구에게 삐졌을 때,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했는데 무시당했을 때,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할 때.
그럴 때마다 들었던 말은 똑같았다.
“그깟 일로 왜 울어?”
“참아야지, 그게 어른 되는 거야.”
“울면 사람들이 널 싫어해.”
그 말들이 내 감정을 억누르는 자물쇠가 됐다.
나는 점점 ‘기분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화를 내는 것도, 속상하다고 말하는 것도, 울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다 사치처럼 느껴졌다.
울고 싶을 땐 이를 꽉 깨물었고, 속상할 땐 ‘내가 별 것 가지고 유난이야’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렇게 자란 나는 결국, 감정을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2. 나의 기분은 늘 두 번째
학교에선 선생님 눈치를 봤고,
집에서는 부모님의 감정을 먼저 살폈다.
친구들과 있을 때도 ‘분위기 깨는 사람’이 되기 싫어 늘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야, 너 기분 나빴어?”
“아니야~ 무슨~ 괜찮아~!”
나는 늘 괜찮았다.
내 기분은 늘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신 다른 사람의 기분은 중요했다.
혹여라도 내가 한 말, 표정, 기운 하나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까봐
나는 나를 꾹 눌렀다.
누가 봐도 ‘배려심 많은 사람’.
하지만 그 안쪽엔 늘, 외롭고 우는 작은 내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아이를 보지 않았다.
심지어 나조차도.
3. 연애에서도, 내 감정은 뒷전이었다
그땐 연애도 감정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거야.”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나의 감정은 또 뒤로 미뤘다.
그 사람이 피곤하다면 내 속상한 감정은 접어야 했다.
그 사람이 기분이 나쁘면, 내가 먼저 사과해야 했다.
그 사람이 힘들면, 나는 힘들어도 안 힘든 척 했다.
“네가 더 힘들겠지, 괜히 내가 힘든 소리 하면 안 되겠지.”
그렇게 내 감정을 밀어넣은 채, 사랑을 줬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넌 너무 무던해서 내가 네 마음을 모르겠어.”
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아, 내가 표현을 못해서 문제구나.”
“내가 너무 티를 안 냈나 보다.”
사실, 표현을 못한 게 아니었다.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렸던 거였다.
아니, 감정이 ‘나쁘다’고 배우며 자라왔기에
표현하는 게 곧 나쁜 사람 되는 거라 믿었던 거였다.
4.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지금의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감정을 죄인 취급하며 살아왔다.
그는 내가 울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그저 웃고만 있을 때마다 말했다.
“너는… 너무 네 마음을 무시하고 사는 것 같아.”
“괜찮은 척 말고, 그냥 지금 기분 말해봐.”
“화나면 화났다고 해도 돼.”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아무도 그런 식으로 내게 감정을 ‘권리’처럼 말해준 적이 없었다.
감정은 참는 게 미덕이라 배워온 나에게
그의 말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였다.
그는 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대신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게 너무 낯설었고,
그래서 더 따뜻했다.
5. 처음으로 감정을 말해본 날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다툼이 있었다.
그는 늦잠을 자서 약속 시간에 40분 늦었다.
나는 괜찮은 척 했지만 속상했다.
그는 말없이 미안하다고만 했다.
그 순간, 평소 같으면 그냥 웃고 넘겼을 텐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나는 항상 괜찮은 척해야 하는 것 같아.
너 기분 상할까 봐, 내가 너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근데 오늘은 진짜 너무 속상했어.”
말하고 나니 두려웠다.
그가 나를 질책하진 않을까.
예민하다고 하진 않을까.
그런데 그는
잠시 내 눈을 보더니 나를 안아줬다.
“말해줘서 고마워.
네 감정 말해준 거, 난 진짜 고맙다고 생각해.”
그 순간, 내 안의 내면아이가 울었다.
누군가 처음으로
‘네 기분도 소중해’라고 말해줬으니까.
6. 감정에도 자리가 있다
그 이후, 나는 조금씩 변했다.
아직도 한 번에 말하지는 못하지만
“나 오늘 좀 불안해.”
“그 말, 좀 속상했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늘 들어주었고,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이 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은 소중한 것이다.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신호다.
그리고 그 감정을 누군가가 귀하게 여겨준다는 건,
사랑이라는 증거다.
7. 나를 바꾸지 않은 사람, 그래서 사랑이 되었다
그 사람은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감정이 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옆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감정을 편안히 둘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는 걸.
그는 내게
처음으로 ‘괜찮아, 너는 그렇게 느낄 수 있어’라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내 감정에 자격을 부여해준 사람.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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