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말하지 마.”
“아니, 말 좀 들어봐. 그게 아니고—”
“그만하자. 나 지금 말 더 하면… 더 상처받을 것 같아.”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심하게 싸웠다.
동거한 지 두 달이 막 넘었을 무렵.
식사 준비 중 쌓여온 작은 불만들이 폭발했다.
설거지 순서, 반찬투정, 청소기 돌리는 시간…
별 거 아닌 것들인데, 왜 그날은 그토록 날카롭게 들렸을까.
나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고,
그는 조용히 현관문을 나섰다.
냉장고 위로는 조명이 드리워지고,
그날 만든 된장찌개는 그대로 식어가고 있었다.
말은 못했지만, 마음은 아직 식지 않았던 밤
혼자 남은 부엌.
싱크대 앞에 기대어 찬물로 손을 씻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그 사람도 상처받았을까?’
‘말을 더 했으면, 덜 싸웠을까?’
‘아니, 아예 시작을 안 했으면 좋았을까?’
그의 신발이 없는 현관이 어색했고,
냉장고가 낼 수 없는 소음이
방 안에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냉장고 문 위, 낯선 쪽지 한 장
다음 날 아침.
나는 혼자 조용히 눈을 떴다.
식탁엔 아무도 없었고,
그의 방도 조용했다.
그런데 주방으로 나가려다
문득 냉장고 문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 하나를 발견했다.
“찌개 데워 먹어요. 오늘 아침은, 내가 미안해요.”
단 한 문장.
문장이 짧아서 더 깊이 박혔다.
그 사람의 말투, 손글씨,
조금 삐뚤어진 '미안해요'라는 말.
나는 냉장고 문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국을 데웠다.
그가 어제 처음 넣어본 애호박이
의외로 부드럽게 익어 있었다.
국 한 숟갈을 떠먹으며,
나는 울컥했다.
‘그 사람도 나만큼 마음이 복잡했구나.’
말 대신 쪽지를 붙인 이유
그날 저녁, 그가 퇴근해 돌아왔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조용히 밥을 차렸고
자연스럽게 식탁에 마주 앉았다.
“쪽지… 봤어요.”
“응. 늦게라도 써야 할 것 같았어요.
말로 하면 또 감정 섞일까 봐…”
그의 고백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당신 말 안 해도… 이미 충분했어요.
냉장고 문 앞에서 울었다니까요.”
그는 웃더니, 내 손을 살짝 잡았다.
“화해하는 법도, 우리만의 방식이 생겨가는 중이죠?”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같이 사는 일은 결국, 싸움 없이 사는 게 아니라,
잘 싸우고, 더 잘 화해하는 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걸.
우린 그 여정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날 밤, 새로운 규칙 하나
식사를 마치고 그가 말했다.
“우리 앞으로, 싸우면 말 안 섞어도 돼요.
대신… 냉장고에 쪽지 하나씩 붙이기.
그게 ‘사과’든 ‘생각 중’이든, 무슨 말이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안 해도, 마음은 닫지 말자’는 약속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냉장고를 우리의 감정 게시판처럼 쓰기로 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가끔은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도,
냉장고 문 위에 하나씩 붙여두기로.
사람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존재니까
어떤 날은 쪽지에 “감기 조심해요. 오늘은 국에 고추 안 넣었어요.”
어떤 날은 “나 아직도 좀 서운해요. 근데 밥 같이 먹고 싶긴 해요.”
그리고 어떤 날은 그냥,
“냉장고에 수박 있어요. 같이 먹어요.”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서로의 마음을 읽어가는 방식을 배워갔다.
말은 순간에 휘발되지만,
쪽지는 오래 붙어 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서로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니까.
사랑은, 쪽지 한 장에서 다시 시작된다
한때는, 작은 다툼이 사랑을 멀어지게 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은 다투지 않아야 지켜지는 게 아니라,
다투더라도 다시 가까워질 용기에서 피어난다는 걸.
그 용기를
그는 조그만 포스트잇 하나로 건넸다.
냉장고 문 위, 그 노란 쪽지 한 장에서
우리는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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