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빛이 바랬고, 너는 여전히 환했다.
나는 다시 회색이 되었는데,
너는 아직도 내게는… 눈이 부셨다.”
1. 컬러풀했던 나날의 끝
그와의 시간이 이어졌던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나는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색 정장대신 머스터드 코트를 입고,
아침 출근길엔 커피가 아닌 자몽에이드를 들고 걷는 내가 낯설 정도로.
그가 내게 말해줬던 수많은 칭찬들.
"이 색은 너랑 진짜 잘 어울려."
"오늘 기분 좋아 보여."
그런 말 한마디에 하루가 반짝였고,
그 말들이 내 옷장, 내 방, 내 기분을 물들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행복이 선명해질수록 불안도 따라왔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진짜 나일까?"
"혹시 내가 이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불안이,
결국 모든 색을 퇴색시켰다.
2. 무지개는 결국 비 온 뒤의 한순간
싸움은 별것 아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보고서를 마감하느라 지쳐 있었고,
그는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로 “밥은 패스하고 그냥 카페가자” 했다.
그 한마디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따갑게 들렸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모르는구나.”
“늘 네 기분만 중요해.”
말들이 톡, 톡, 쏟아졌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앉아 내 말을 다 듣더니 말했다.
“미안. 너 많이 지쳐 있었구나.”
그 말이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는데,
이해받고 싶었는데,
왜 그 한마디에 마음이 더 멀어졌을까.
그날 이후,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서로가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먼저 손 내미는 쪽이 지는 것 같아서.
3. 무채색으로 돌아온 일상
다시 검은 코트를 꺼내 입었다.
텀블러엔 블랙커피를 담고,
책상 한켠에 놓여 있던 파란색 볼펜은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나답지 않던 모습들을 지우듯이,
나는 예전의 ‘회색 인간’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말했다.
“요즘 왜 다시 예전처럼 보이지?”
“뭔가 무드가 다르네.”
그는 그 후로 두 번 연락했다.
한 번은 ‘잘 지내?’
그리고 한 번은 ‘시간 괜찮으면 전시 보러 갈래?’
나는 그 메시지를 보며
수십 번이나 답장을 썼다 지웠다.
하지만 끝내 보내지 못했다.
내가 물든 색이 거짓같았고,
그가 밝게 웃던 날들이 꿈같아서.
4. 그는 여전히 컬러였다
며칠 후,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컬러풀했다.
연두색 스웨터에, 체크무늬 토트백.
그의 옆에는 팀 선배와 함께였고,
나는 모른 척하려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그 짧은 인사 속에도
여전히 색이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다시 회색이 되었을까?’
‘왜 그와 멀어지자마자 모든 색을 지워버렸을까?’
그때 깨달았다.
색은 그 사람이 입혀준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통해 내 안에서 꺼내 쓰던 것이었다는 걸.
5. 나에게도 다시 색이 올 수 있을까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가 주고 간 색연필 세트를 꺼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이어리 한 구석에 그림을 그렸다.
무지개 모양도, 사람 얼굴도 아닌
그냥 선 몇 개.
그런데 그 선에도
내가 모르는 색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전시회, 아직도 가고 싶어요.”
그는 곧 답장을 보냈다.
“이번 주말 어때요? 같이 보러 가요 :)”
6. 회색과 컬러는 공존할 수 있다
우린 다시 만났다.
완벽하게 아무 일 없었던 사람들처럼 웃을 순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전시회장엔 이전보다 더 많은 색이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그에게 말했다.
“나, 사실 아직도 무채색이 익숙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회색도 예쁜 색이야.
거기 위에 하나씩 올리면, 더 진해지거든.”
나는 그 말에 울컥했다.
그는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 숨겨진 색을 찾아주는 사람이었다.
7. 나를 물들이는 건, 나 자신이었다
돌아가는 길, 나는
카페에 들러 딸기라떼를 시켰다.
그가 아니라 내가 고른 색이었다.
집에 돌아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립스틱을 꺼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이젠 안다.
사랑은 누군가가 칠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안의 색을 믿고 꺼내 쓸 수 있도록
옆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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