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야기(사랑)

🧄 다시 마농지에서, 너를 만났다

히야121 2025. 6. 24. 23:33

 

– 짠지보다 더 짭조름했던 우리, 다시 제주에서

“우린 짠지 같았지. 오래 절여야 맛이 나는 관계였는데…
너무 서둘러서, 그 맛을 모르고 떠나버렸어.”

그리고 1년 뒤, 그날의 짠지 냄새와 함께 너를 다시 마농지에서 마주쳤다.


🍂 잘 지내고 있어요? 라는 말 대신

2024년 가을.
평대리에 바람이 많던 날.
사람은 많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혼자였다.

나는 또다시 마농지를 찾았다.
짠지와 흑마늘 라떼, 그리움이 버무려진 맛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를 잡고 앉은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짠지 하나 추가요. 두 접시까진 안 부담스럽죠?”

그 목소리.
내 심장이 순간, 다섯 걸음 앞서 뛰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렸을 땐,
이미 그는 나보다 먼저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우리 눈빛이 마주친 그 찰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정지한 것 같았다.


📦 우리, 그때 왜 그렇게 급했을까

그와 나는 작년 이맘때, 마농지에서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 반년간을 서로에게 매달렸다.
주말 비행기, 새벽 통화, 마늘장아찌를 택배로 주고받던 감성.

하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려는 속도보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속도가 더 빨랐고
우리는 어느 늦가을, 말없이 멀어졌다.

마지막 문장도 짠지 같았다.

“우리, 잠깐만 멈추자.”

멈춘 줄 알았던 감정은
이제 다시 마늘밭 사이를 지나 바람을 타고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 마늘밭 옆, 다시 앉은 그 자리

우리는 별말 없이 같은 자리에 앉았다.
예전에도 함께 앉았던 마늘밭 옆의 야외 나무 테이블.

“여긴 여전히 마늘 냄새가 나네요.”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신도 여전하네요.
짠지 추천하는 습관도.”

그는 웃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었어요. 사실은요.”
그 말 한 마디에,
지난 겨울의 눈바람 같은 시간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 계산하지 않은 마음들

우리 사이에 있었던 건
계산하지 못한 다정함과,
미처 버무리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때 우린 사랑보다,
사랑을 ‘잘하려는 마음’에 너무 매달렸던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못 본 채로 헤어졌던 거죠.”

그 말이 나오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마치 짠지처럼, 시간이 지나니 비로소 제맛이 나는 대화.


🌦️ 비 오는 마농지, 말 대신 머문 온기

그날 마농지엔 갑자기 비가 내렸다.
비닐 하우스 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리에
우리 대화는 잠시 멈췄다.

나는 괜히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손등에 닿았다.

그 온기.
계산하지 않고 닿은 감정이
말보다 빠르게, 깊게 스며들었다.

“이젠 우리가 어떻게 절여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눈물 대신 미소로 대답했다.


🛬 우리는 또 다른 계절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이별을 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마늘밭의 향기와 함께 피어났다.

그는 말했다.
“이번엔 너무 빨리 익히지 말자.
짠지처럼, 서서히 우리만의 맛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흑마늘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 끝에 오는 그 단맛.
그게 꼭 그 사람 같았다.
아프고, 그립고, 다시 따뜻한 사람.


📸 마농지에서 다시 찍은 우리

우리는 그날,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사진을 찍었다.

작년의 사진보다 조금 더 어색했고,
조금 더 진지했으며,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

마농지의 마늘은
1년 내내 절여져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

우리도 그랬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멀어졌지만 익어갔다.

그리고 이제,
마농지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 재회란, 짠지처럼 느리게 스며드는 맛

이별이 끝이라 생각했던 날들.
하지만 진짜 사랑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

그가 마지막에 말했다.

“내년 이맘때도,
여기서 다시 짠지 같이 먹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잡고,
마늘밭을 천천히 걸었다.

사랑은, 짠지처럼
기다리고, 견디고,
그리고 다시 맛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