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타이로 시작했고, 매듭으로 약속했다(2)
🎀 첫 다툼: 가까워질수록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다.
서로를 알고 싶어 가까워지다 보면, 때로는 말 한 마디, 표정 하나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우리 사이도 그랬다.
예쁘게만 자라날 줄 알았던 관계는, 어느 봄날 오후, 예상치 못한 말 한마디에 금이 갔다.
🌧️ 무심했던 말, 그리고 이상한 침묵
그날도 평소처럼 그녀의 공방을 찾았다.
창밖에 벚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던 오후, 나는 예고 없이 나타났고 그녀는 잠깐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웃었다.
“깜짝이야. 연락도 없이.”
“그냥... 네 얼굴 보고 싶어서.”
“그렇게 불쑥 오면 곤란해요.”
그녀의 말은 웃음 섞인 듯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쿡 찔렸다.
“그냥... 반가운 줄 알았는데.”
“아니, 반갑긴 한데... 오늘 작업량 많아서 정신없었거든요.”
“그럼 말하지. 나 혼자 괜히 들떴나 보네.”
내 말투가 조금 날카로웠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까지 말 안 해도 되잖아요. 나도 나름 반가웠는데.”
“그래서? 오지 말 걸 그랬다는 거야?”
그녀는 말없이 실을 손에 쥐고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정적.
카페에서, 공방에서, 한강에서 웃던 우리 둘은 없었다.
🪡 어긋남의 실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봐요.”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였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진짜 바빴거든요. 손님 두 팀 예약도 있고, 납품 일정도 미뤄졌고... 그런 날에 당신이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니까... 솔직히 반갑긴 했지만 당황했어요.”
“미안. 나는 그냥, 우리가 그 정도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어. 말 안 해도 괜찮은... 그런 사이.”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말이 뼈처럼 박혔다.
우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서로의 ‘속도’는 달랐다.
🧤 거리 두기, 그 어색한 일주일
그 이후, 우리는 일주일 가까이 연락을 줄였다.
내가 먼저 연락하면, 그녀는 짧게 답했다.
그녀가 보내오면, 나는 일부러 답장을 늦게 했다.
서운함을 주고받는 일, 사랑보다 더 쉽고도 힘든 일이었다.
밤마다 습관처럼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봤다.
바뀌지 않은 사진, 여전히 라떼를 들고 있던 모습.
그때는 그렇게 예뻐 보였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이대로 멀어지면 어떡하지.’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 다시 꺼낸 메시지 한 줄
메시지보내기메시지 보내기
“혹시, 토요일 괜찮으면... 다시 한강 갈래요?”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침대 옆에 내려두었다.
5분이 지나고, 10분...
30분 만에 도착한 그녀의 답장.
“응. 7시, 여의나루역에서 봐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렸다.
🌉 한강, 말없이 걷는 우리
7시 정각, 여의나루역 3번 출구.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백팩에 회색 가디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우리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말은 많지 않았다.
그저 강변을 따라 걷는 발소리만이 리듬을 탔다.
잠시 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방어적이었죠?”
“나도 배려 못 했어요. 사실...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알아요. 그래서 더 미안했어요. 당신 마음 다 알면서, 그날은 내가 너무 지쳐 있었나 봐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 다음부턴... 감정 숨기지 말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대신, 서로 말할 기회는 꼭 주기.”
“그럼요. 우리, 그렇게 약속하자.”
🎁 그녀가 내민 작은 노트
그날 밤, 그녀는 가방 속에서 작은 노트를 하나 꺼냈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에, 연한 보라색 표지.
“이거... 내가 요즘 만들고 있는 감정 노트예요.”
“감정 노트?”
“응. 하루에 하나씩 내 감정을 기록해요. 말로 꺼내기 어려운 날도 있잖아요.”
노트 안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4월 3일. 너무 보고 싶은데, 바빴다. 마음은 반가웠지만, 말로 표현이 안 됐다.’
그날이었다. 우리가 처음 다퉜던 날.
“나 이런 마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한 장을 넘겨, 빈 페이지에 연필로 짧게 썼다.
‘4월 10일. 미안했고, 보고 싶었다. 다시 웃게 해줘서 고마워.’
그녀는 그 글을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다투는 날도 이렇게 기록하자.”
“응. 그러면 나중에 웃으면서 볼 수 있겠지.”
🫧 다툼 이후, 더 단단해진 우리
사람 사이엔 가끔 금이 가는 날이 있다.
하지만 그 금을 함께 들여다보고, 손잡고 메워가는 사람이라면,
그건 사랑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었다.
첫 다툼은 아팠지만,
그만큼 서로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첫 여행: 사랑은 같은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일
“우리... 어디든 멀리 한번 가볼래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첫 다툼 이후, 마음을 다시 천천히 풀어가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한강을 걷고 있었고, 별다른 대화 없이도 서로에게 기대고 있던 시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설렘과 망설임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좋지. 가자. 우리 둘만 아는 작은 도시로.”
🗺️ 목적지는 군산
우리는 긴 고민 끝에 ‘군산’을 선택했다.
서울에서 멀지도 않고, 사람이 덜 북적이면서도 예쁜 풍경이 있는 도시.
무엇보다, 그녀가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가 컸다.
“군산은 옛 감성이 살아있는 도시래요. 옛날 극장도 있고, 다방도 있고, 오래된 빵집도 있고.”
“그래? 우리 그럼... 1박 2일 시간여행 가는 거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작고 단정한 여행 가방 하나씩을 들고, 익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 기차 안, 두근거리는 침묵
“이런 여행,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예요?”
“음... 아마 대학교 졸업 여행 때? 너는?”
“전... 혼자만 다녔어요. 누구랑 이렇게 같이 여행하는 건 처음.”
그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조용히 그녀 손등에 손을 올려주었다.
말 대신, 따뜻함으로 전하는 마음.
“그럼, 오늘부터 네 여행에는 ‘우리’가 있어.”
그녀가 작은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 시간 위에 머문 도시
군산역에 도착하자, 도시 전체가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듯했다.
도로 위엔 자동차 소리 대신 자전거 바퀴 소리가 들렸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열려 있었다.
“여기... 진짜 조용하다.”
“응. 우리 말고는 세상이 멈춘 것 같아.”
우리는 걷기로 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해,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신흥동 일본식 가옥 거리까지.
그녀는 오래된 건물 하나하나에 발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겼다.
“이런 데 오면... 꼭 뭐라도 남겨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그럼, 나도 적을까? 너한테 쓴 편지처럼?”
“진짜요?”
나는 웃으며 가방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2025. 봄. 너와 걷는 길 위에서,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 메모를 받아 가방 속에 고이 넣었다.
“나중에 여행 끝나고 다시 꺼내요. 그러면 이 하루가 다시 살아날 거예요.”
🍞 여행의 맛, 빵과 다방
군산엔 오래된 빵집이 있다. 7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그곳.
우리는 줄을 서서 단팥빵과 야채빵을 샀다.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빵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단팥이 너무 꽉 찼어요!”
“이게 ‘진짜빵’이야. 속이 알차잖아.”
그녀의 볼에 팥소가 살짝 묻었고,
나는 웃으며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근데 왜, 네가 더 맛있게 먹는 것 같지?”
“여행의 진심은 ‘빵’이죠.”
그렇게 웃고 나면, 마음의 거리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저녁엔 오래된 다방에 갔다.
보온병에 담긴 커피, 노란 조명, 낡은 LP판.
“이런 분위기, 처음이에요.”
“나도. 근데 어울리네. 우리랑.”
그녀는 벽 쪽에 붙은 포스터를 바라보다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저기에 있네. <러브레터>.”
“그 영화 유명하잖아. ‘오겡끼데스까~’”
내가 흉내를 내자 그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근데, 이상한 사람 덕분에 오늘 웃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좋아요.”
🌙 밤, 같은 이불 아래에서
숙소는 구옥을 리모델링한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얇은 이불 두 개, 다정한 조명, 살짝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처음이네요. 누군가랑 이렇게 조용한 밤을 함께 보내는 거.”
“무섭지 않아?”
“무서운데... 편해요. 당신이 옆에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고,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이렇게 가끔씩 도망치듯 여행하자. 세상에 치이기 전에, 우리끼리 숨 쉴 수 있게.”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약속이요.”
🌅 다시 서울, 그리고 우리
기차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들판, 산, 하늘.
모든 풍경이 어제보다 더 깊이 마음에 새겨졌다.
“이상해요. 그냥 1박 2일이었는데, 한 달쯤 있었던 기분이에요.”
“그러게. 너랑 있으니까 시간이 길게 흐른 것 같아.”
“다음 여행 땐 어디 가요?”
“그건... 보타이가 결정해줄 거야.”
“또 그거야?”
“응. 보타이 색깔 뽑아서, 그 색 닮은 도시로 가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엔... 라벤더 색 뽑아요. 제주도 가자고.”
💌 그리고 다음 이야기로...
이제 둘의 감정은 더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났다고 사랑이 쉬운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