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야기(사랑)

“우리는 보타이로 시작했고, 매듭으로 약속했다(1)

히야121 2025. 6. 22. 01:09

🎀 보타이 사러 갔다가 생긴 인연: 우연이라는 이름의 설렘

1. 특별한 날, 특별한 보타이를 찾아서

평소에는 넥타이 한 줄로도 충분했던 내가, 하필이면 그날 따라 ‘보타이’를 고집했던 건 왜였을까. 6년 만에 연락이 닿은 선배의 결혼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다른 감정,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울 성수동의 작은 편집숍. SNS에서 봤던 보타이 전문 샵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전날 밤 우연히 넘긴 피드에서였다.
"여기 어때? 너 스타일일 것 같은데."
친구가 보내준 DM 하나가 그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2. 처음 본 순간, 익숙한 낯선 미소

“어서오세요.”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인사.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마음속 어딘가가 움찔했다.

“보타이 찾으시는 거예요?”

“아, 네. 이번 주말에 결혼식이 있어서요. 턱시도는 준비했는데, 보타이가 없더라고요.”

“잘 오셨어요. 턱시도 색상이 블랙이면, 이 쪽 라인이 잘 어울리실 거예요.”

그녀는 내 얼굴을 한번 스치듯 바라보더니, 고운 손끝으로 몇 가지 보타이를 꺼내 놓았다.
그녀가 보여준 보타이 중 하나, 진한 밤하늘색에 미세한 골드 실이 박힌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이거, 해보셔도 괜찮을까요?”

그녀가 직접 내 목에 보타이를 대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 순간, 매장 안의 시간은 잠시 멈춘 것 같았다.

3. 그녀의 이름은 수연이었다

“이거 정말 잘 어울리세요. 딱이에요. 손님보다 이 보타이가 더 좋아하겠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거울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디서 뵌 적 있나요? 왠지 낯이 익어서요.”

그녀는 잠시 머뭇이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예전 학교 다닐 때, 교내 연극제 혹시 보신 적 있나요?”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대학교 2학년 때, 연극반 친구 따라 봤던 한 편의 연극.
하얀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서 울던 여자 주인공.
그게 그녀였다.

“혹시... 햄릿에서 오필리어 하셨던 분?”

“맞아요.” 그녀가 웃었다. “그땐 진짜 부끄러웠는데... 기억해주시네요.”

우리는 그렇게, ‘보타이’ 하나로 시작된 대화 속에서 과거의 추억까지 꺼내게 되었다.

4. 샵 밖의 커피 한 잔

보타이를 결제하고 나서도 매장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나도 그녀도, 어딘가 조금은 서성이며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혹시... 근처에 괜찮은 카페 있나요?”

“같이 가시겠어요?”

그 말 한마디에, 우리 사이의 거리도 훅 좁아졌다.
성수동 골목길을 따라 들어선, 무채색의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기 제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혼자 올 때도 많고...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져서요.”

그녀는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앞에 두고 손을 감쌌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날 무대에서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나요.”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작게 웃었다.

“그 장면... 대부분 잊었다고 하던데요.”

“그 눈물... 진짜였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근데, 공연 전날 헤어졌어요.”

내 마음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고백이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

5. 어쩌면, 보타이는 핑계였을지도

그 후로 우리 둘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편했다.
길게 메시지를 쓰지 않아도, 한두 마디면 충분했다.

“오늘도 보타이 잘 메고 왔어요.”
“어울릴 것 같았어요. 덕분에 그날도 기억에 남았어요.”

어느 날은, 그녀가 보타이 만드는 공방에 초대해주었다.
조용한 오후, 햇살이 드리운 창가에서 실을 꿰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워 보였다.

“여기 오는 사람들 중에, 이렇게 오래 얘기 나눈 사람은 처음이에요.”

“저도요. 그냥... 보타이 하나 사러 왔던 건데.”

“사람 인연이 참 이상하죠. 어떤 날, 왜 그 길을 택하게 되는지.”

6. 결말을 정하지 않은 이야기

우리는 지금,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애매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연락이 없을 때도 있지만, 문득문득 그리움처럼 생각나는 사람.

어쩌면, 보타이라는 작은 소품이 만든 인연이었기에 더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가끔 그 샵에 들른다.
새 보타이가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어서.
그리고 오늘도 그녀에게 한 통의 메시지를 남긴다.

“이번 주말, 다시 그 카페 갈래요?”

인연은 거창한 사건 속에 있지 않다.
작은 보타이 하나를 고르던 순간에도, 누군가의 눈동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당신도 오늘, 어떤 작은 선택 하나가 누군가와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길.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우연 속 특별한 순간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 그 이후의 데이트: 나란히 걷는다는 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

“이번 주말, 다시 그 카페 갈래요?”

내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메시지. 읽음 표시가 뜬 지 2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무심한 듯 바라보던 창밖, 서서히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을 몇 번이고 켰다 껐다. 그러다 문득, ‘너무 들이댔나?’ 싶어 자책하고 있을 즈음...

띵—

“좋아요. 토요일 3시, 그 자리에서 만나요.”

그녀였다.


📍 성수동, 그 카페. 다시 그 자리

토요일 오후. 난 미리 도착해 있었다. 괜히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테이블에 놓인 작은 꽃병 속 하얀 안개꽃이 괜히 더 예뻐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부드러운 베이지색 린넨 셔츠에,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가 서 있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 말, 거짓말인 거 알죠?”

“...네. 사실 20분 전에 도착했어요.”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 참 좋다. 별말 안 해도, 그냥 같이 웃게 된다.


☕ 라떼 두 잔 사이의 이야기

“사실... 저 그날 이후, 자주 생각났어요.”

그녀가 컵을 감싸쥐며 말했다.

“어떤 날은 매장에 누가 들어올 때마다, 혹시나 해서 문 쪽을 봤어요.”

“왜요? 제가 또 보타이 사러 올까봐요?”

“그것도 있고... 그냥요. 그날 대화가,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아서.”

나는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우리, 앞으로도 종종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는 라떼 위의 거품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보타이 사러 오는 사람 말고요?”

“보타이 안 사도 갈게요. 커피 마시러, 공방 놀러, 그리고... 그냥 당신 보러.”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거절해요.”


🎨 공방에서의 두 번째 만남

며칠 뒤, 그녀는 내게 공방에 놀러 오라고 했다.
하필이면 그날 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우산을 들고 성수 골목을 걷는데, 마음이 묘하게 설렜다.

공방 문을 열자, 그녀는 실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된 그림 속 한 장면 같았다.

“왔어요?”

“응. 그냥... 오고 싶었어.”

“비 맞진 않았고요?”

“조금.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따뜻한 거 줄게요.”

그녀는 티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내주었다. 그리고는 내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

“이상하죠. 우리, 아직 친구도 아닌 것 같고, 연인도 아닌 것 같고.”

“맞아요. 애매해요.”

“근데 전 그게 좋아요.”

“왜요?”

“딱 이 거리감. 서로 조심스러우면서도,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그 느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요. 천천히 걸어가고 싶어요.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 필름 카메라 속 한 장의 기억

어느 날, 그녀는 낡은 필름 카메라 하나를 내밀었다.

“찍어줄게요.”

“저를요?”

“네. 여긴 빛이 예쁘잖아요.”

나는 카메라 앞에 서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포즈 잡으면 돼요?”

“아니요. 그냥... 웃어요. 당신 그 진짜 웃음.”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시간이 고스란히 한 장면에 담겼다.

“이거 인화해서 드릴게요. 다음에.”

“다음에... 꼭 봐야겠네요.”

“그래야 또 보겠죠.”

그녀의 말에,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한강, 나란히 걷는 밤

한 달쯤 지난 후였다. 우린 한강을 걸었다. 여름이 오기 전의 선선한 저녁.

“처음 보타이 사러 왔던 날, 기억나요?”

“그럼요. 그날 아니었으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었겠죠.”

“그때 저 사실, 꽤 많이 외로웠어요.”

“왜요?”

“보타이 같은 소품 하나에도 위로받고 싶을 만큼.”

“그럼... 저는 위로가 됐나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도요.”

나는 그녀 손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천천히, 오래 보고 싶어요. 지금처럼, 나란히.”

그녀는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그래요. 말로 정하지 않아도, 마음은 느껴지니까.”


📦 그리고, 그녀가 준비한 작은 상자

얼마 후, 그녀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게 건넸다.
포장을 풀자, 수제로 만든 보타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내가 처음 고른 색감과 닮았지만,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재질.

“직접 만든 거예요?”

“응. 처음 만난 날, 당신이 고른 색깔 기억나요?”

“그럼요. 밤하늘색.”

“그 색에... 제 감정을 조금 섞었어요. 이건, 우리 이야기예요.”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 우리는, 아직도 써내려가는 중

그 후로도 우리는 가끔 다투고, 가끔 멀어졌다가도,
결국 다시 만나 웃는다.

보타이 하나로 시작된 인연은
어느새 계절을 지나, 마음을 담아낸다.

우리 관계에 이름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함께 자라나는 중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