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야기(사랑)

산 딸기 사랑, 붉게 익어간 계절(3)

히야121 2025. 6. 20. 00:09

5장. 다시 찾아온 여름, 그리고 약속
지훈이 떠난 지 벌써 10개월이 흘렀다. 그날, 수연은 마을 어귀에서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다시 오겠다”는 그의 말은 분명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불안이 자라났다. 도시의 바쁜 일상 속에, 자신이 잊히는 건 아닐까.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그해 겨울, 수연은 매일 마을 우체국에 들러보곤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지훈에게서 편지도,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히 앨범을 펼쳐, 함께 찍은 사진들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흘렸다.

“이렇게 좋아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다 어느 날, 봄바람이 따뜻하게 불던 4월의 어느 저녁. 수연은 마을 초입의 버스정류장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헝클어진 머리, 가벼운 배낭, 그리고 어색한 정장 차림.

“지훈 씨…?”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수연은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눈가가 시큰해지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수연 씨… 나, 다시 왔어요.”

“정말… 온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가까이 다가온 지훈은 조용히 수연의 두 손을 잡았다.

“이젠… 여기서 사진 찍고 싶어요. 매일.”

그날 저녁, 둘은 함께 마루에 앉아 봄볕을 맞았다. 지훈은 수연에게 서울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일도 바빴고, 고민도 많았다고.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고.

“수연 씨… 내가 왜 연락 못했는지 말할게요. 서울에서 한동안… 마음이 많이 복잡했어요.”

“그래서… 날 잊고 지냈어요?”

“아니요. 오히려 너무 많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겁났어요.”

“겁났다는 건…?”

“내가 진짜 여기서 살아갈 수 있을까. 당신 옆에 있는 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그런 생각들.”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나도 그랬어요. 당신이 올까 봐… 안 올까 봐… 하루하루가 길었어요.”

지훈은 수연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제 알아요. 하루하루 기다리는 게, 당신 없는 하루보다 훨씬 더 외롭다는 걸.”

며칠 뒤, 지훈은 마을회관 앞에 작은 간이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여행을 다니며 찍은 자연 사진들과, 마을에서 찍은 풍경, 그리고 수연의 미소가 담긴 몇 컷.

마을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게, 우리 수연이 맞나?”

“와, 도시 사진기사는 다르긴 다르네!”

수연은 수줍게 웃으며 사람들 틈에서 사진을 바라봤다. 지훈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제 이 마을에서 사진관 하나 열까 생각 중이에요.”

“정말요?”

“응. 산딸기 시즌엔 관광객도 많고… 아이들 성장사진도 찍어주고.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매일, 당신을 찍을 수 있으니까.”

수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더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여름이 다시 찾아왔다. 산딸기가 붉게 익어가듯, 둘의 감정도 다시 선명하게 물들고 있었다. 수연은 이른 아침, 지훈과 함께 산에 올라 산딸기를 따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하면, 지갑 잃어버린 게 참 다행이에요.”

“왜요?”

“그게 없었으면, 당신 못 만났을 테니까요.”

지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일부러 떨어뜨린 걸 수도?”

“뭐야! 정말요?”

“아니, 농담이에요.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또 지갑을 떨어뜨릴 거예요.”

그날 밤,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서 두 사람은 마당에 앉아 있었다. 모기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수연은 지훈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물었다.

“우리…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지훈은 고요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나는 알아요. 당신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 그게 전부예요.”

그 말에 수연은 눈을 감았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수많은 기다림과 불안을 모두 덮어주는 듯했다.

6장. 다시 떠나는 계절 앞에서
지훈이 마을로 돌아온 지도 두 달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매일같이 함께였다. 새벽엔 산딸기를 따고, 낮에는 동네 아이들 사진을 찍고, 저녁이면 마루에 앉아 별을 세었다.
그러나 계절은 또다시 흐르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바람 속에는, 어김없이 변화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지훈 씨, 서울 일은… 어떻게 됐어요?”

수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한참을 마루에 앉아 사진 보정을 하고 있던 지훈이 손을 멈췄다. 망설임이 그 눈가에 스쳤다.

“이번 주에 연락이 왔어요. 복직 제안이었어요.”

“...그래서요?”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수연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감잎차를 내려놓았다. 그 잔이 내려앉는 소리가 그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밤이 되자 지훈은 마당으로 나가 별을 바라보았다. 마을은 고요했고, 풀벌레 소리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옆에 조용히 다가온 수연이 그의 옆에 앉았다.

“내가 잡아도… 떠날 거죠?”

지훈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당신이 없던 열 달 동안… 난 매일 당신이 있던 벤치에 앉았어요.”

수연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 말투는 마음 깊은 데서부터 새어나오는 고백이었다.

“여긴… 당신이 있기엔 좁잖아요. 하고 싶은 일도, 이루고 싶은 꿈도 많을 텐데…”

“하지만 당신이 없으면, 그 모든 게 의미 없어요.”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무릎을 감싸 안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며칠 뒤, 수연은 자신이 담근 산딸기청 한 병을 지훈에게 건넸다. 손글씨로 쓴 라벨엔 조그맣게 “2025 여름, 당신과”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서울 가서 힘들 때, 마셔요. 여긴 언제나 당신 거니까요.”

지훈은 병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안았다.

“내가 미안해요. 늘 당신을 기다리게만 해서. 또 이렇게…”

“기다릴 수 있어요. 당신이 날 놓지만 않는다면.”

그 말에 지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 위로 뜨거운 감정이 흘렀다. 한참을 안은 채로, 여름밤의 정적 속에 마음을 녹여갔다.

그리고 며칠 뒤, 수연은 버스정류장에 나왔다. 지훈은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를 타러 나왔다. 짐은 많지 않았다. 작은 배낭 하나, 손에 든 산딸기청 한 병, 그리고 가슴 가득한 미련.

“기다릴게요. 너무 오래 걸리진 마요.”

수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훈은 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번엔 안 늦을게요. 꼭 돌아올게요.”

버스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지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올라탔다. 창 너머로 수연이 손을 흔들었다. 지훈은 창에 손을 댔다.

‘기다릴게요. 꼭 돌아와요…’

지훈이 탄 버스는 굽이진 산길을 따라 멀어져갔다. 수연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버스가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바람이 잔잔히 불었다. 그녀는 가만히 속삭였다.

“지금 이 계절이 다 지나고, 산딸기가 또 익을 때쯤… 당신도 다시 익어 돌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