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한 그릇에 담긴 사랑, 평양 처녀와 미식가의 운명적 만남”
"냉면 좋아하세요?"
그날도 서울의 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햇살이 아스팔트 위를 타고 넘실거리고, 바람 한 점 없는 도시 속에서 냉면은 유일한 구원 같았다. 미식 블로거이자 냉면 마니아인 '재현'은 방금 SNS에서 화제라는 평양냉면집에 도착해 입구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뒤에서 조심스레 들려온 목소리.
"여기 혹시...평양냉면 잘하세요 ?"
재현은 뒤를 돌아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분위기, 단아한 차림새, 그리고 어디선가 낯익은 억양의 말씨.
"네, 여기 메밀 향도 진하고, 육수도 깊어요. 줄 서서 먹을 만한 집이죠."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평양에서 왔거든요. 서울 냉면은 아직 낯설어요."
그 순간, 재현의 뇌리에 번개가 스쳤다. '진짜 평양 사람? 평양냉면을, 평양 처녀와 함께?'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까.
🍜 첫 만남, 첫 그릇의 떨림
재현은 용기를 냈다. "혼자 드세요?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추천 좀 해드릴까요?"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 서울식 냉면에 대해 배워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냉면을 앞에 두고 앉았다. 그릇에 담긴 육수의 맑은 윤기, 잘 삶아진 고명, 고추냉이를 곁들인 간장소스 이야기까지—재현은 마치 설명회를 열듯 이야기했고, 그녀는 경청했다.
"서울 냉면은 이렇게 시원하고 깔끔하네요. 평양에선 조금 더 심심하죠.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해요."
그녀의 말투는 마치 오래된 시집의 한 구절 같았다. 섬세하고 조심스럽고, 그러나 속에는 깊은 향수가 담겨 있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리혜진이에요. 그냥 혜진이라고 불러요."
💬 서울과 평양 사이
냉면집을 나와 둘은 근처 공원 그늘 아래 앉았다. 햇살은 뜨겁고, 공기는 습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시원했다.
"혜진 씨, 서울은 어때요?"
"조금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해요. 가족도 없이 혼자라서.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냉면 먹으면서 얘기하니 고향 생각도 나고... 좋아요."
재현은 그 말에 괜히 마음이 뭉클했다. 단지 냉면 하나로 시작된 대화였지만, 그녀의 존재는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저... 다음에 다른 냉면집도 같이 가보실래요? 여긴 시작일 뿐이거든요. 제가 리스트를 쭉—"
"좋아요. 근데요..."
혜진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제가 말 안 한 게 있어요."
🤫 숨겨진 이야기
그녀는 평양 출신이 맞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비밀은, 그녀가 바로 오늘 갔던 냉면집의 사장님의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전 그냥... 음식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서울 음식도 궁금하고, 사람들이 이 냉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싶었어요."
재현은 말을 잃었다.
"그럼… 오늘 우리 앉았던 그 자리도…"
혜진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릴 적 아버지 가게에서 고무줄로 메밀국수 흉내 내며 놀던 자리예요."
❤️ 다시 만난 그 자리
시간은 흘렀고, 여름도 서서히 끝나갈 무렵. 재현은 블로그에 그녀와 함께 다녔던 냉면집 리뷰를 올리지 않았다. 그녀와의 추억은 그저 그의 마음 속에 저장된 하나의 여름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다시 찾은 그 냉면집. 그는 또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에요, 재현 씨. 오늘은 제가 직접 면을 뽑았어요. 맛 좀 봐줄래요?"
재현은 고개를 돌렸다. 혜진이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얼굴은 살짝 더 익었지만 눈빛은 그날처럼 맑았다.
🌿 오픈 엔딩의 온도
"서울 냉면, 이제 익숙해졌어요?" 재현이 물었다.
"아뇨, 아직도 어렵고 낯설어요. 하지만... 그 낯섦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맛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날, 둘은 다시 냉면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육수는 여전히 시원했고, 여름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날로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다음 여름, 또 다른 냉면집에서 다시 시작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