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자원봉사 끝나고, 그와 처음 걸은 길》
“봉사활동 종료 안내드립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참 더운 8월의 마지막 날, 우리는 ‘자원봉사자’라는 이름표를 반납했다. 주황색 조끼도, 체크리스트도, 물통도 이젠 더 이상 들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아직 작별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나는 장난스레 물었다.
“이젠 자원봉사자 동료 아니잖아요. 그럼 뭐라고 부르면 돼요?”
그는 망설이다 웃으며 말했다.
“음… 데이트할 사람? 아니면… 잠재적 연인?”
“잠재적은 좀… 불확실해서 싫은데요.”
“그럼… 그냥, 우리. 지금부터 만들어가자, 우리라는 이름을.”
그 말이 참 따뜻했다. 애매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정확하지 않아도 함께하겠다는 그 마음이, 여름 내내 받은 햇볕보다 더 따뜻했다.
첫 데이트, 선풍기 하나 돌아가는 그의 방
그는 다음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밖은 아직도 너무 더우니까… 선풍기 바람이나 같이 쐬어요."
처음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오래된 전세 빌라의 작은 원룸. 책들이 쌓여 있었고, 선풍기는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에어컨 없어요?”
“응. 전기세 아끼느라. 그 대신 얼음물은 늘 준비되어 있어요.”
그는 냉장고에서 작은 얼음병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작은 책상 위에 나란히 앉았다.
가스불도 없고, 전자레인지 하나뿐인 그의 부엌. 그런데 그 조촐한 공간이 왠지 따뜻했다.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멋진 데이트 코스는 아니지만… 이게 진짜 제 모습이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보여줄게요. 내 민낯. 여름 내내 화장 지우고 봉사 다녔던 거 눈치 못 챘죠?”
“아니요. 계속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좋았던 거예요.”
그날의 대화, 그날의 눈빛
우리는 별 얘기 아닌 이야기로 오후 내내 웃었다.
유통기한 지난 라면 하나로 서로 놀리고,
“이거 내 생일보다 오래됐네?”
“이 라면이 당신보다 오래됐으면, 이 집에선 나이가 제일 많은 라면이다.”
말장난 하나에도 배꼽 잡고 웃었다. 그리고, 조용해진 틈에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 당신이 나를 봐준 게 신기했어요. 나는 가진 게 별로 없고,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요, 그거 알아요? 당신은 특별하지 않은 걸 특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요. 손수건 하나, 얼음물 하나, 웃는 얼굴 하나… 그게 나한텐 다 특별했어요.”
그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 말 없는 시간이, 오히려 내겐 고백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두 번째 만남, 다시 돌아간 골목
며칠 후, 나는 봉사활동 장소였던 북문 쪽 골목을 혼자 걷고 있었다. 익숙한 담벼락, 얼음물 주던 그 골목, 함께 우산을 나눴던 모퉁이.
그때 갑자기 그의 문자가 왔다.
“혹시 지금 북문 쪽이에요?”
“…혹시, 보고 있었어요?”
“아니요. 그냥… 생각나서 왔는데, 당신도 와 있었구나.”
나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 그가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검게 그을려 있었고, 손엔 또다시 작은 접이식 우산이 들려 있었다.
“이젠 비 안 오잖아요.”
“그래도 우산은 챙겨야죠. 언제 또 같이 쓰게 될지 모르니까.”
우리가 다시 자원봉사를 시작한 이유
그날 우리는 길가 벤치에 앉아 이런 얘기를 나눴다.
“활동은 끝났지만… 우리, 그냥 매주 한번은 이 동네 오자. 물 한 병 들고 어르신들 안부라도 묻자.”
“공식 봉사는 아니지만, 그냥… 우리 둘만의 방식으로요?”
“그래요. 누군가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기도 했어요.”
“당신이랑 같이 걸을 수 있는 핑계 같기도 했고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났다.
사랑이란 게 꼭 거창한 이벤트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었다.
소소한 마음들이 쌓여 어느덧 사랑이 되어가는 시간.
폭염이라는 계절적 인연이 아니었어도, 어쩌면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여름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의 손수건에 담긴 마음, 선풍기 바람에 묻어나는 따뜻함, 무심히 건네는 물 한 병의 의미.
“우리에게도 계절이 생긴 거예요”
그는 말했다.
“봄은 꽃 피는 계절, 가을은 단풍이 지는 계절. 그리고 여름은… 당신을 만난 계절이에요.”
나는 대답했다.
“그럼 우리, 해마다 여름이 오면 북문 골목으로 다시 걷자.”
“손에 물 한 병, 그리고 서로의 손 하나씩.”
그 여름은 끝났지만, 우리의 계절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