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주에서 작은 라디오를 연다
“오늘 저녁 방송은 우리 둘이 같이 하자.”
“나, 아직 마이크 울렁증 있는데.”
“괜찮아. 당신 목소리는... 익숙해서 더 좋아.”
제주도의 바람은 익숙해졌고,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도 자연스러워졌다.
이젠 ‘그녀’가 아니라 연우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제주 구좌읍 바닷가 근처에 작은 라디오 스튜디오를 열었다.
간판은 없다. 다만 입구 옆에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을 뿐이다.
‘라디오 1127’
- 마음이 다급한 날, 여는 곳
이름의 1127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날 이후, 삶이 아주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
“아침에는 당신이 방송 준비하고, 나는 커피 내릴게.”
“그럼 점심에는 내가 음악 큐시트 만들게.”
“저녁엔?”
“같이 사연 읽자.”
이젠 그런 대화가 우리에겐 습관이 됐다.
사연은 전국에서 온다.
서울, 부산, 목포, 심지어 캐나다에서 온 사연도 있었다.
“여기서 당신들 방송을 들으면, 나도 제주에 있는 것 같아요.”
“위로받고 싶을 때, 그 목소리 떠올라요.”
“누구보다도 진심인 말, 그게 힘이 됐어요.”
우리는 말한다.
라디오는 목소리만 있지만, 그 안엔 마음이 있다고.
그리고 그 마음을 보내는 건 언제나 사람이라고.
🎙️ 우리가 읽는 사연, 우리가 살아내는 이야기
“오늘은 특별한 사연이에요.
익명 요청하신 분인데요, 이렇게 적어주셨어요.”
“3년 전 이별했던 사람의 생일이 오늘이에요.
전화번호는 지웠지만, 아직도 생일은 기억나요.
이 마음... 잊어야겠죠?
아니면, 그냥 한 번쯤... 안녕이라도 말해볼까요?”
나는 마이크 앞에서 잠시 멈췄고, 연우가 대신 말을 이었다.
“그분이 들으셨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잊지 못한 기억은 그만큼 진심이었고,
그 진심은 당신의 삶에 남아 빛이 됐을 거예요.
그래서 괜찮아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해도.”
그녀의 말에,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오래 눈을 감았다.
🌿 라디오 밖의 사랑
라디오가 끝나면, 우리는 마당에서 귤나무를 본다.
제주에 와서 처음 심은 나무.
처음엔 조그만 묘목이었지만 지금은 가지가 무겁게 늘어질 만큼 자랐다.
“우리 사랑도 이 나무 같을까?”
“응. 느리고, 천천히 자라는데... 뿌리가 깊어지고 있어.”
가끔은 싸우기도 한다.
녹음 타이밍을 놓쳐서, 음악 선택으로 의견이 엇갈려서,
아침에 한 말 때문에 하루종일 서로 말 안 하고 지낸 날도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둘이서 사연을 읽는다.
그건 마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의식 같았다.
🍃 청취자가 아닌,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
“혹시... 여기가 라디오 1127인가요?”
어느 날, 스튜디오 앞에 익숙한 사연자가 찾아왔다.
수줍게 웃으며, 꽃다발을 안고.
“이 사연, 제가 보낸 거였어요.”
“남편이 암 투병 중이에요.
매일 당신들 방송을 틀어놓고, 웃더라고요.
그 목소리 덕분에, 하루하루 버텼어요.”
우리는 그분을 안아줬다.
한 사람의 하루에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든다.
📻 사랑과 라디오의 공통점
“라디오는... 말로 전하는 진심이잖아.
사랑도 그래. 결국 말로 살아나.”
연우가 어느 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방송에서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
사연과 사연 사이에 남겨진, 나와 그녀의 이야기들.
“나중에 그거 책으로 내자.”
“제목은?”
“우리는 제주에서 작은 라디오를 연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우리 진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
✨ 제주에서의 삶, 그건 ‘함께’라는 단어의 다른 말
해가 지고, 마지막 곡이 흐르는 시간.
🎵 “윤하 - 기다리다”
그 노래를 틀어놓고,
우리는 그날의 마지막 사연을 천천히 읽는다.
“사랑이라는 말,
그게 꼭 연인 사이에만 쓰이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의 하루를 함께 지켜봐주는 일,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대답은 하지 않아도,
이미 같은 마음인 걸 알기 때문이다.、
(예고편) 그녀와 내가 읽은 사연, 그 뒷이야기들